프로를 꿈꿨던 적이 있다. 으레 말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났다고 자만하던 시절.
결과부터 말하자면 정상에는 올라보지 못했고 꽤나 많이 후회도 했다.
입단 테스트를 통해 클랜에 들어갔을 때 당시 우리 클랜 주축 멤버는 부산지역 리그 우승 경력이 있는 소위 말하는 전국구 top5 클랜이었다.
3차 정규리그가 열릴 즘 우리 클랜은 지역별로 나뉘어 베스트멤버를 꾸렸고, 각각 서울 부산으로 두 팀이 본선에 진출했다.
나는 그중에서 부산 팀에 기존 리그 우승 멤버에서 두 명이 탈퇴하여 그 자리를 대역으로 들어갔었고, 나름 대회 준비도 순조롭게 진행됐었다.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스크림을 하는 횟수도 늘어났고, 아무래도 자주 보다 보니 아이디가 더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는데 내 맞라인에는 항상 세기말풍운이라는 친구가 서있었다.
승률은 반반 정도 됐었는데 우리가 오리엔스 쪽 승률이 많이 암울했다. 나도 이오니아에 비해 기용할 수 있는 챔피언 풀이 좁기도 했고.
온라인 예선을 거쳐 32강부터는 본선이었는데 사무국에서 참가 의사를 물어왔다. 팀장 형이 연락을 받고 우리에게 x월x일에 서울에 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서울에는 올라갈 수 없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해당 일정을 소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비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어머니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불합리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 들어주셨기에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어떠한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그저 안된다고 일축하며 거절했고 끝내 어머니의 완강한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멤버들에겐 미안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당시에 팀원들도 전부 학생이었고,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 그들도 나를 선뜻 지원할 수는 없었다.
예비 멤버를 포함한 6인이 엔트리였기에 나를 제외한 서브 멤버로 출전했지만, 그 친구는 나와 포지션이 달랐기에 결국 실력을 모두 보여주지 못하고 우리 팀은 탈락하고 말았다.
3차 리그에 우리 클랜의 여정은 서울 8강 부산 32강의 초라한 성적으로 막을 내렸고, 멤버들은 흩어져 각각 다른 클랜으로 둥지를 옮기거나 현게를 타거나 그렇게 하나둘씩 연락이 끊어졌다.
나도 당시의 팀원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으로 더는 대회 준비를 할 자신이 없었고, 천천히 접속이 뜸해지며 다른 게임으로 발길을 돌렸다.
중간에 지인들에게 연락이 와서 리그오브레전드라는 게임이 나왔는데 같이 해보는 건 어떠냐고 했지만 한 귀로 흘려들었다.
한국 정발도 안 된 게임이었고 내 안에 무언가도 많이 무너진 상황이라 두려웠기에 도망쳤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군 입대를 선택했다.
정작 군 생활 중에 나는 그 리그오브레전드라는 게임에 뒤늦게 빠져 생활관 TV를 독차지하고는 인비테이셔널 리그 영상을 돌려보기 바빴다.
그러다 우연히 TV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강찬용. MIG blaze에 엠비션이란 선수의 이름이었다. 두 눈을 의심했다. 왜 쟤가 저기에 있지?
서울팀에 세기말풍운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그 친구가 리그오브레전드의 프로가 되어 우승하는 모습을 보니 세상 참 모를 일이구나 싶다가도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때는 많이 늦었던 것 같다.
경험 상 프로를 노린다면 가장 열심히 경험을 축적해야 할 19~23세의 나이를 모두 헛되이 날렸던 내가 이제 와서 다시 처음부터 쌓아나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은 게임이 취미생활이 되어 함께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후회가 많이 남아있긴 하다.
반대를 무릅쓰고 단기 알바라도 해서 혼자 힘으로 일어서볼걸.
인생에 할까 말까 하는 고민이 있으면 일단 해보라는 얘기가 있다. 어느 쪽을 골라도 후회할 거라면, 해보는 게 경험이고 하다못해 아쉽지라도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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