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ORY

오랜 친구의 연락이 달갑지 않은 순간에 대해.

쭈루짱나눈짱 2023. 5. 1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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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3년 내내 붙어 다녔던 단짝 친구가 있었다.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갈 때 나는 인문계열로, 그 녀석은 공고로 진학해 점차 소원해졌던 그 녀석이 오랜만에 연락해 온건 20살 겨울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인사치레의 안부로 이야기를 시작해 3년의 시간을 함께한 우리의 즐거웠던 시절을 추억하기도 하며 웃고 있었다.

 

대화 도중 녀석은 자신은 지금 일을 하고 있고 내게 할 거 없으면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않을래?라며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당시에 나는 군 입대를 계획하고 게임기획 동아리 활동을 제외하면 어떠한 경제적 활동 없이 집에서 온전히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던지라 집에서 쉬는 거보다야 좋지라고 수긍했고 조만간 밥이나 한 끼 하자는 기약 없는 말과 함께 통화는 끝이 났다.





2~3일 정도가 지나고 다시 그 녀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기 일하는 곳의 선배님한테 내 이야기를 했고, 흔쾌히 좋다고 얘기하셔서 다시 연락했다고 녀석은 말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와보면 안다. 그냥 영업하는 일 같은 거라는 애매한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영업은 조금 곤란할 것 같다며 알아봐 줘서 고맙지만 이번 일은 사양하겠다고 했고 녀석은 괜찮다고 회유하다가도 너랑 같이 일하면 재밌을 거 같다던가 자기 체면을 봐서 면접만 봐달라던가 하다못해 그냥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가라고 끈질기게 설득하여 마지못해 얼굴만 비추러 가기로 했다.




그 녀석과는 11시쯤 서면에서 만나기로 했고 약속보다 조금 일찍 나가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쯤 왔냐고 해서 롯데백화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더니 곧 데리러 온다고 말한 녀석은 5분 정도 뒤 모습을 보였다.




4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녀석은 여전히 내가 아는 모습 그대로였고 재회의 해후를 풀고자 했던 나와 달리 그 녀석은 어딘가 급해 보였다.

일하던 중에 나온 거라 조금 급하다. 미안한데 그냥 빨리 만나보고 점심은 조금 있다가 같이 먹자고 녀석이 얘기했다.





그러고는 서면 1번가의 골목골목을 지나 어떤 낡은 3층 건물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kt법인사무소라는 간판이 붙어있었고, 안에는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테이블 곳곳에 채워 앉아있었다.

집업 후드를 입고 나온 나만 어째 드레스코드를 맞추지 못해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녀석은 나를 빈 테이블 하나에 앉혀두고 선배를 데리고 오겠다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북적거리는 어색한 환경을 보며 법인사무소는 무슨 일을 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어느새 그 녀석이 선배라고 부른 여성 한 분과 함께 내 앞에 와있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선배와 친구가 내 양옆으로 앉아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여자는 내게 어떤 일인지 설명을 들었냐고 하기에 와보면 안다고 하고 얘기를 안 해주더라고 했더니 싱글싱글 웃으며 왜 얘기를 안 해줬지? 이상한 일 아니예요라며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을 시작했다.




입구에 kt법인사무소라는 간판 보셨죠?라는 말로 우선 대중적 인지도를 기반으로 한 신뢰와 법인사무소라는 타이틀의 위엄 등으로 이 사업이 합법적임을 내게 얘기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여긴 일반적인 대리점과는 달리 선불폰을 판매하는 곳이라고 했다.



선불폰의 장점 설명 사업성 설명 등 장황한 얘기가 오갔지만 중요한 골자는 여기서 일하게 될 내가 우선 내 명의로 선불폰을 뚫어서 사용해 보고 그 이후로는 영업을 통해 여러 사람들에게 선불폰을 팔아 수익을 남기라는 거였다.

그리고 선불폰 자체의 혜택이 좋으니 나도 하나 하라는 것.





곰곰이 생각해 보다 이야기의 허점 같아 보이는 부분을 몇 개 질문하자 어영부영 말을 돌리며 잘 모르셔서 그렇다고 끊어버리더니 이내는 내게 몇 살이냐 가족은 몇 명이냐 여자친구는 있냐 그런 면접이라기보단 호구조사에 가까운 이야기를 시작했고 갑자기 사업설명회가 열린다며 강의실로 데려갔다.



강사가 입장하자 강의실은 박수와 함성으로 가득 찼고 좋은 기를 받고 싶다며 악수를 청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강사에게 몰려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가히 광신도 집단에 가까웠다.

 

그 강사는 본인이 어느 티어라고 설명했는데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난다. 다이아였나?



아무튼 업계 내에서 상위 1%에 속한다는 것 같았다.

이 선불폰 사업은 그런 자신이 흥행을 보장하며 여러분이 여기에 함께 하게 된 건 엄청난 행운에 가깝다고 했다. 

 

기존의 다단계의 인식은 피라미드 구조로 뒤에 시작하는 사람들이 꼭대기에 있는 사람에게 착취당하다 말라죽는 방식이었지만 이 사업은 다단계가 아닌 네트워크마케팅으로 거미줄 구조로 되어있어 서로 상호작용하며 늦게 시작한다고 손해 보지 않는다고 거창하게 연설을 이어갔다.

모두가 그 강의를 박수와 함성으로 함께했지만 나만 이세계에서 온 것처럼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이상한 건가? 그들이 이상한 건가?

 

거의 같은 내용을 30분 내내 반복하다시피 설명한 강사는 화려하게 퇴장했고 강의실을 나오자 다시 친구 녀석과 그 여자 선배가 나를 인터셉트했다.




내가 강의를 들으러 간 사이 사업을 시작할 만한 괜찮은 조건들을 알아봐놨다며 설명해 주겠다고 했고 또 일주일 뒤에 경주 5성급 신라호텔에서 1박2일로 수련회 같은 게 있는데 함께 가자는 권유였다. 

 

이 모든 것에 베풂이나 체험 개념은 없었고 전부 돈이 엮여있었다.

우선 선불폰을 20만원치 개통해서 사용하라는 것과 수련회 참가비 5만원을 내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럴 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지 돈을 내고 일해야 하는 이 이상한 상황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여자는 내게 이걸 비싸다고 생각하지 마라, 돈을 쓰는 게 아니라 투자다. 다 회수가 되는 돈이며 당장 25만원이 크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한 달 뒤엔 200~300만원이 들어온다.라고 설득해왔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떻게 200~300이 들어오는지는 얘기해주지 않았고 선불폰 영업에 따른 인센티브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또한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내 친구와 그녀가 짜고 내게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은 정황상 확실해 보였다.




그럼 수련회만이라도 가보고 결정하겠다. 하지만 당장 내가 금전적 상황이 여유롭지 않으니 수련회 비용을 지원해 준다면 그것은 나중에 돌려주겠다고 했고, 그것도 안 된다고 했다. 5만원을 빌려줄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 25만원의 가치를 쉽게 논하는 상황이 그저 웃길 따름이었다.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했더니 조금만 더 이야기해 보자고 붙잡거나, 내 친구가 감시하듯 따라붙거나 하는 상황이 꽤나 꺼림칙하면서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고 마지막에는 그냥 안 하겠습니다.라고 단칼에 거절하고 일어나자

 

어떻게 이 자리까지 데려왔는데 놓칠 수 없다는 것 마냥 친구가 과거 우리가 함께했던 추억을 들먹이며 매달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소를 벗어났다.

 

친구는 허겁지겁 뛰어서 나를 따라왔고 미안하다고 했고 일단 선배하고 얘기할 게 좀 남아서 밥은 같이 못 먹겠다며 다음엔 진짜 밥 한 끼 같이 먹자는 말을 남긴 채 그 녀석은 다시 사무소로 뛰어올라갔다.

 

이틀 뒤 나는 장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고 그런 내게 녀석은 병문안을 왔다.

 

그렇게 잠시 아무것도 아닌 얘기를 하다가 잠깐 연락할 곳이 있는데 깜박하고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을 안해와서 돌아갈 때까지 간당간당할 것 같다며 휴대폰을 잠시만 빌려달라고 했다.

녀석은 문자를 보내면서도 그 날의 사업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며 이야기를 했고,문자를 보낸 뒤 인터넷을 켜서 무언가를 검색하려다가 내 검색 기록에 남겨진 kt법인사무소와 다른 여러 선불폰 사업으로 등록된 기업들을 검색한 기록을 보고는 말했다.

 

찾아봤던 거냐고

 



음침해서 기분 나빴지만 솔직하게 얘기해주는 게 그래도 친구였던 그 녀석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 전했다.

 

솔직하게 네가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기뻤고, 나에게 그런 걸 권유해서 가슴 아팠고, 이런 식으로 구차하게 나와서 실망했다고.

앞으로 연락하지 말자고 녀석과의 관계에 종언을 고했다.




그 녀석도 나름의 반성이었는지 그냥 너는 내가 아는 녀석 중에 제일 똑똑한 녀석이니까 너라면 나와는 다르게 잘하지 않을까 해서 연락했던 거라고 미안하다고 했다.

 

선불폰 사업은 단통법 이후 종적을 감췄고 아마 녀석도 빚을 어느 정도 남긴 채 다른 일을 찾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아무튼 오랜 친구의 연락이 이후로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종교권유 X

결혼식 X

돌잔치 X

장례식 X

카드만들기 X

돈빌리기 X

옥장판 X

다단계 X

보증 X

보험 X

정수기 X

건강식품 X

 

요즘은 오랜만에 연락하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위처럼 부가 설명을 붙이는 안부가 웃프게도 유행하는 시대가 왔다.

 

친구 사이에 가깝고 먼 것은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인 것인데 우리가 흘려보낸 시간만큼이나 멀어져왔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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